19년 써도 무뎌지지 않는 칼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장자 이야기를 하나 해 보려고 합니다.

러닝 글에 웬 장자냐 싶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들어 보세요. 읽다 보면 꽤 달리기 얘기처럼 들리실 겁니다.

『장자』에 포정이라는 요리사가 나옵니다. 포정이 소를 잡으면 칼 소리가 장단에 맞아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왕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냐고 묻자, 포정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라고 답합니다.

덩어리에서 결로, 결에서 몸으로

포정은 처음에 소 전체만 보였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나자 뼈와 근육 사이의 틈이 보였고, 지금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며 칼을 씁니다.

러너도 비슷한 길을 갑니다.

  • 처음에는 코스가 "40km"라는 덩어리로만 보입니다. 숫자에 겁먹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힘으로 버팁니다.
  • 경험이 쌓이면 오르막, 내리막, 평지, 급수 지점, 체력이 꺼지는 구간이 따로따로 보입니다. 구간마다 전략을 다르게 짭니다.
  • 더 가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지금 페이스가 맞는지 몸이 압니다. 호흡과 다리 느낌만으로 조절합니다. 시계는 여기까지 가도록 도와주는 숫돌일 뿐이고, 목표는 숫자 없이도 아는 것입니다.

칼은 곧 내 다리입니다

포정은 보통 요리사는 뼈를 내리쳐서 한 달마다 칼을 바꾸고, 솜씨 좋은 요리사는 살을 베어서 1년마다 바꾼다고 했습니다. 자기 칼은 19년을 썼는데도 방금 숫돌에 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뼈를 내리치는 러너는 오르막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내리막에서는 브레이크를 꽉 밟으며 쿵쿵 내려옵니다. 무릎과 허벅지 앞쪽에 부담이 쌓이고, 부상으로 시즌을 날립니다. 한 달마다 칼을 바꾸는 셈입니다.

결을 따르는 러너는 가파른 오르막은 파워하이킹으로 걷고, 내리막은 보폭을 짧게 해서 중력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지형과 싸우지 않고 지형에 몸을 맡깁니다. 19년을 써도 날이 서 있는 칼입니다.

틈을 보는 눈

포정은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다고 했습니다. 포정이 칼을 틈에 넣듯, 트레일 러너는 바위와 뿌리 사이에서 발 디딜 곳을 찾습니다. 눈은 3~5m 앞에 두고, 발은 알아서 디디게 둡니다. 산 전체가 아니라 다음 몇 걸음의 결을 보는 겁니다.

엉킨 곳에서는 천천히

포정도 뼈와 힘줄이 엉킨 곳에 이르면 어렵다는 걸 알고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칼을 놀렸습니다. 러너에게는 젖은 바위, 급경사 너덜길, 다리가 풀린 후반 구간이 그런 곳입니다. 넘어지는 사람은 실력이 부족한 사람보다, 쉬운 구간의 리듬 그대로 어려운 구간에 들어간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장단에 맞는 소리

몸이 잘 풀린 날은 발소리와 숨이 박자를 맞춥니다. 달리는 게 춤처럼 느껴집니다. 포정의 칼 소리도 그랬을 겁니다. 기술을 넘어선 도라는 게 아마 그런 상태일 겁니다.

칼을 닦아 넣는다

소를 다 가른 포정은 칼을 들고 서서 한 번 둘러보며 흐뭇해하고, 칼을 닦아 넣습니다. 러너에게는 회복입니다. 완주하면 한 번 돌아보고, 몸을 닦고 쉬게 해 줍니다. 그래야 다음 대회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삶을 기르는 법, 양생(養生)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달리기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빨리 닳는 러너가 아니라, 평생 달리는 러너가 되는 법.

2026. 10. 15. · Written by 음파(U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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